[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근대 시기 영등포 일대의 변화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지점에 있었던 영향이 큽니다. 변화의 시작은 노량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경인선 철도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 시작 지점이 노량진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경부선 철도를 계획하며 저지대인 노량진보다 상대적으로 고지대이면서 평탄한 영등포 일대에 철도 건설 본부와 공업 지대가 생기며 무게 중심이 영등포로 넘어왔습니다. 그래도 노량진의 위상을 보여주는 시설이 있습니다. 서울 한강 유역 최초의 교량이 용산과 노량진 사이에 놓였습니다.
한강 철교와 인도교
1899년에 개통된 최초의 경인선 구간은 인천과 노량진 사이였습니다. 초기에는 용산에서 배를 타고 노량진으로 건너가서 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철교가 놓이는 1900년까지는 그랬습니다.
한강에 최초로 놓인 교량인 한강철교는 1897년에 착공해 1900년에 준공되었습니다. 경인선은 이때부터 서대문역까지 연장되었습니다. 1912년에 상류 쪽에 두 번째 철교가 놓이며 복선화되었고, 1944년에는 하류 쪽에 세 번째 철교를 건설했습니다.
경인선과 한강철교가 없던 시절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려면 육로로 10시간, 배편으로는 8시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철도 개통 이후에는 2시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서울과 인천이 가까워졌다고 하네요.
철교는 열차만 건너는 교량이었습니다. 인도교가 생기기 전에 사람들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고요. 한강 인도교는 1917년에 준공되었습니다.
하지만 1925년의 을축년대홍수 때 인도교 일부가 무너져 1929년 복구할 때까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1937년 보수공사를 하며 인도교는 다리 폭이 넓어졌습니다. 버스와 전차가 한강 인도교를 함께 이용하게 되자 노량진 일대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습니다. 반면 나루터는 점차 기능을 잃어 갔고요.
한강 인도교는 한국전쟁 때 폭파되기도 했습니다. 정전 후에도 복구하지 않고 임시로 부교 등을 이용하게 하다가 1957년부터 복구하기 시작해 1958년에 완료했습니다.
복구할 동안 서울 강북의 시내버스는 용산까지만 운행하고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습니다. 발이 묶인 시민들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도교 부설 후 외면당하던 나룻배가 반짝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한강 전역에서 나룻배들이 몰려들었나 봅니다. 당시 신문을 보니 오십여 척의 나룻배가 용산과 노량진 사이를 운행했는데 바가지요금을 받았다고 지적하네요.
인도교가 폭파된 1950년 6월 28일 국군은 한강철교도 함께 폭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만 파괴되었습니다. 철교는 병력과 군수품을 나르는 보급의 중요한 길목이라 복구를 서둘렀습니다.
제1철교는 1951년 6월에 임시로 복구되었고, 제2철교는 1952년 7월에 임시로 복구되었습니다. 제3철교는 1952년부터 복구하기 시작해 1957년 7월 복구를 완료했고, 이후 제3철교로만 열차를 다니게 했습니다.
임시 복구 후 이용하지 않던 두 철교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제대로 복구하게 되는데 1969년 6월 28일에 완공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철교를 폭파한 바로 그 날짜였습니다.
혹시 한강 인도교, 즉 한강대교를 걸어서 가본 적 있나요? 아마도 차를 타고 지나간 적은 많아도 걸어서 가본 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한강 남쪽에서는 노량진의 노들나루공원이나 흑석동의 효사정 공원 앞 산책로를 통해 한강 인도교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한강대교는 쌍둥이 다리입니다. 1982년에 새로운 다리가 개통돼 두 교량을 합쳐 왕복 8차선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한강 철교는 철도청 직원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멀리서 눈으로만 봐야 합니다. 한강 남쪽에서는 노량진의 사육신역사공원에서 가장 잘 보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놓인 세 개의 철교는 국가등록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94년에는 복선 철교가 추가로 놓였습니다.
인천에 물을 공급한 경인수도
노들나루공원은 과거에 노량진 수원지가 있던 자리입니다. 원래는 인천에 상수도를 급수하기 위해 건설한 시설이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인천에는 일본인 거류민들이 급증했습니다. 다양한 기반 시설이 들어섰지만, 인구 증가에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식수가 부족해 우물을 파야 했는데 그래도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량진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습니다.
그때의 흔적이 수도국산(水道局山)입니다. 이 산은 인천 동구 송현동과 송림동에 걸쳐 있는데 원래 이름은 만수산 혹은 송림산이었습니다. 1908년에 송현배수지가 들어서며 수도국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도 시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송현배수지는 노량진 수원지와 수도관으로 연결되었고, 1910년 12월부터 인천 일대는 노량진으로부터 물을 급수받게 되었습니다.
수도관을 땅에 묻은 다음 그 위에는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수도길’ 혹은 ‘수도선로’라 불렸습니다. 수도길은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지나 김포와 부천 그리고 부평을 거쳐 인천으로 가는 도로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수도길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주요 도로 중 하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로 진입하는 유엔군이 이용한 작전 도로이기도 했고요.
부천을 지나는 수도길 구간에 ‘수도로’라는 도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옛 수도길 구간 대부분은 이면도로가 되었거나 사라져서 흔적을 찾기 힘듭니다. 다만 아직 수도관이 묻힌 곳이 있어 토지대장의 지목에 ‘수’로 되어 있는 옛 수도길 구간이 남아 있습니다.
지목 수는 ‘수도용지’를 말하는데 ‘물을 정수하여 공급하기 위한 취수ㆍ저수ㆍ도수(導水)ㆍ정수ㆍ송수 및 배수 시설의 부지 및 이에 접속된 부속 시설물의 부지’를 일컫습니다.
지적도를 보면 옛 수도길의 경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에서도 지목이 ‘수’인 도로가 있습니다. 수원지가 있던 노들나루공원 일대와 노량진수산시장 일대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방역 북쪽의 ‘여의대방로61길과 62길’이 지목이 수도용지입니다.
이 도로가 신길역 쪽으로 넘어오면 ‘영등포로57길’로 도로명이 바뀌는데 이 길 또한 지목이 수도용지입니다. 대방동에서 신길동으로 이어지는 옛 수도길은 지금 기준으로는 좁은 이면도로이지만 과거에는 이 지역 주요 도로 중 하나였을 겁니다.
관련 기록을 참고하면, 신길동을 지난 수도길은 영등포 로터리에서 영등포로에 진입해 오목교를 거쳐 인천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신길동 이후 영등포 구간에는 지목 ‘수’ 구간이 보이지 않다가 오목교를 건너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인선이나 경인수도에 쓰인 ‘경인(京仁)’은 지금은 경기도와 인천을 합친 단어로 쓰일 때가 많지만, 과거에는 서울과 인천을 한데 묶어 부르는 단어였습니다. 그만큼 서울의 발전 혹은 팽창에는 인천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등포와 노량진은 두 지역을 경인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인 거 같습니다.